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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식]부드럽고 달큼한 애호박찌개, 그리운 할아버지 떠올리는 맛

서울 마포 '동리장' 애호박찌개(앞)와 애호박전./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마포 ‘동리장’ 애호박찌개(앞)와 애호박전./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충청도 음성 시골집 담장에는 애호박 덩굴이 있었다. “호박 좀 따와요.” 할머니가 말을 하면 할아버지는 툴툴거리며 담장에 갔다. 달려 있는 애호박은 여러 개였다. 어떤 기준인지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늘 시간을 들여 애호박을 골랐다. 땀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초여름이었다. 가지를 치지 않아 높게 자라버린 자두나무에는 빨간 자두가 하나 둘 열렸다. 웃자란 텃밭 상추와 깻잎은 따기가 무섭게 새잎이 자랐다.

잠시 후 꽃이 그려진 스테인리스 상에 애호박 넣은 된장찌개와 오이 무침, 쌀밥, 창란젓, 그리고 냉수가 올라왔다. 애호박이 흐물거릴 정도로 푹 익었다. 된장찌개 국물과 함께 퍼서 입에 넣으면 진한 단맛이 퍼졌다. 할머니는 “나이 들수록 밥이 진 게 좋다”며 물을 많이 넣고 밥을 했다. 그 밥에 애호박 넣은 된장찌개 국물을 비벼 먹었다. 오이 절임은 아삭아삭 상큼했고 간간한 창란젓에 밥을 쉽게 비웠다. 냉수를 마시고 식사를 마치면 충청도의 야트막한 산 너머 하얀 구름이 보였다.

고깃집에 가면 된장찌개에 마치 공식이라도 된 것처럼 애호박을 넣는다. 옛날 할머니가 끓여주던 맛이 떠올라 오히려 더 손이 안 간다. 대신 애호박 많이 나는 초여름이 되면 칼국수 생각이 난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가면 ‘살구나무집’이 있다. 정원 한가운데 살구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시골집에 온 듯 오래된 기운이 서린 이곳 메뉴는 단출하다. 그 중에서 꼽으라면 역시 칼국수와 만두다. 가스 버너에 올려놓고 끓여 먹는 칼국수는 면이 라면처럼 꼬여 있다. 일자로 쭉 뻗은 면에 비해 국물이 빨리 배었고 쫄깃한 맛도 더했다.

큼지막한 냄비에 쓸어 담다시피 가득 넣은 바지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유처럼 뽀얀 국물을 냈다. 한 줌 넣은 건새우는 고소한 향을 냈다. 그 사이를 메운 것은 애호박의 유장한 단맛이었다. 쉽게 끊기지 않는 애호박의 단맛은 바다를 옮겨놓은 듯 시원하게 물결치는 칼국수 국물 안에 나지막한 쉼터를 만들었다. 연식 되어 보이는 집 분위기와 다르게 만두에는 치즈를 잔뜩 넣었다. 얇은 피 안에 든 브로콜리, 치즈, 알새우의 조합은 시간이 흘러도 살아남는 집의 저력을 방증하는 것 같았다.

동쪽으로 자리를 옮겨 가락시장 근처에 가면 ‘명인밥상’이 있다. 지하에 몇백 평 규모로 크게 식당을 낸 이 집은 밥상 그 자체가 메뉴다. 고등어구이, 제육구이 등 주가 되는 음식이 있고 경상도 산골 식으로 간간하게 무친 나물이 십여 종 올라왔다. 촉촉한 제육볶음, 기름기 흐르는 고등어구이도 좋지만 제대로 챙겨 먹으려면 보리굴비로 가는 편이 좋다.

보리굴비의 내장까지 긁어내 밥 위에 올려 나물을 곁들이면 경상도 어느 산골에 와 있는 것 같다. 애호박을 말려 무친 호박 나물은 옛날 식으로 말렸다 익힌 덕에 엿처럼 씹을수록 단맛이 쭉쭉 뽑혀 나왔다. 삼색 모음전을 시키면 육전, 애호박전, 감자전이 함께 나온다. 애호박전은 모양새가 평범했지만 이 집 간장을 찍으면 맛이 달라졌다. 익힐수록 더해지는 애호박의 맛에 황토 내음이 나는 듯 묵힌 맛과 초의 산뜻함이 어울려 바람 부는 농막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했다. 갓 지은 밥, 오래 익힌 장을 조물조물 버무려 맛이 구석구석 밴 나물, 짭조름한 보리굴비 한 마리, 배가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마포로 오면 ‘동리장’이 있다. 이름과 달리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은 이 집은 애호박을 주 무기로 한다. 달게 무친 깍두기와 빨간색 소시지전은 오래된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이 집 음식의 맥락을 보여주는 전초전이다. 광주 식으로 굵게 썬 애호박과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푹 끓여 기름지고 매콤한 국물이 어린 애호박찌개는 맛에 빈틈이 없었다. 돼지고기 지방의 달달한 풍미에 연두색 애호박의 부드러운 맛과 식감이 터질 듯한 양감으로 다가왔다.

돼지고기 수육과 어리굴젓은 미국 NBA 스테픈 커리의 자유투를 보는 것처럼 맛에 흔들림 없는 안정감이 있었다. 애호박을 잘게 썰고 통새우를 박은 뒤 간간히 빨간 고추를 섞어 부친 애호박전은 밥과 물로만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오래 익혀 재료가 무른 느낌이 없고, 애호박과 새우의 조합은 애호박과 돼지고기의 조합과 또 다른 통통 튀는 매력이 있었다.

음식을 먹을수록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당신은 절대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 법이 없었다. 꼿꼿이 등을 세우고 손자들에게도 엄하게 꾸중을 했다. 반주 몇 잔에도 몸을 흔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시골집에 우리가 온 날이면 얼굴에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손자들과 함께 애호박을 고르고 따던 손길에 숨길 수 없는 자상함이 있었다. 여름 햇살처럼 구분 없이 모두를 밝히는 사랑이었다.

#살구나무집: 칼국수 7000원, 만두 8000원.

#명인밥상: 고등어구이밥상 1만3500원, 보리굴비밥상 2만5000원, 삼색모음전 1만5000원.

#동리장: 애호박찌개 7500원, 애호박전 1만5000원, 어리굴젓수육 2만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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